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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문해력이란 무엇인가?

by baewoonam 2023. 11. 3.

문맹률과 문해력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의 97.9%가 글을 읽고 쓸 줄 압니다. 옛날에 글을 못읽으면 ‘까막눈’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거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세계적으로 순위가 아주 높을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은 않네요. 200여 개 국가 중에서 69위입니다. 어쨌든 문맹률, 즉 비문해율은 매우 낮은 편입니다. 우리 모두는 대략 이와 같은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훈민정음, 즉 한글 덕에 읽고 쓰는 것은 세계 그 어느 나라의 국민들보다 더 편하게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런데 요즘 여기저기에서 문해력과 관련된 이야기가 우스개소리처럼 들려옵니다. ‘심심한 사과'를 젊은 친구들이 ‘심심해서 지루한 사과'로 알더라는 이야기, 어떤 사람이 참 ‘고지식'하다고 평하자 그 사람의 ‘지식이 높다'는 것으로 알아듣더라는 이야기, ‘금일까지 제출해주세요'라고 알리니 ‘금일'을 ‘금요일'로 알더라는 이야기, 점심식사 대신 ‘중식'이라고 적어놓으니 ‘중식'을 ‘중국식 식사'라고 이해하더라는 이야기, 외계 행성이 무대인 소설의 주인공을 두고 작가가 ‘지구력'이 좋다고 적어놓으니 ‘지구력'은 지구에서나 쓰는 말이라고 흠을 잡더라는 이야기(‘오래 버티며 견디는 힘'인 ‘지구력'을 ‘지구의 힘'으로 착각)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문해력'이 상당히 낮아졌다는 걱정과 함께 말이지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이 98% 가까이 되는 나라에서 글을 읽고 이해할 줄 아는 ‘문해력'이 낮아졌다,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제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넘어서는 특정한 종류의 문해력이 필요해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문해력이란 무엇인가?

문해력은 영어 literacy의 번역어입니다. 문식성이라고도 합니다. 문해력, 문식성 모두가 사용됩니다. 학문적으로는 문식성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쓰는 것 같고, 대중적으로는 문해력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듯 합니다. 윤준채 교수님의 논문(<<문해력의 개념과 국내외 연구 경향>>)에 따르면 문해력은 대충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 혹은 ‘계약서에 서명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정도라고 할 수 있답니다. 이렇게 보면 비문해율, 즉 문맹률을 측정하는 기준과 별 다를 바가 없는 듯 하지요. 

 

그러나 문해력의 개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요구에 따라 의미가 점점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1970년대 정도에는 문해력이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 정도를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상적인 활동, 가정, 일터,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문서화된 정보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됩니다. 그리고 문해력을 조금 더 세분화해서 산문 문해력, 문서 문해력, 수량 문해력의 세 영역으로 나눕니다.(국제 성인 문해 조사) 여기서 산문 문해력은 신문 논설이나 시, 소설 등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을 말하고요. 문서 문해력은 월급 명세서나 열차 시간표 등의 문서를 읽고 그 안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는 능력을 말하지요. 수량 문해력은 돈을 주고 받거나 물품을 주문하거나 이자를 계산하는 등, 문서 안에 있는 숫자를 간단하게 계산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말합니다. 윤준채 교수님은 이를 정리해서 ‘개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글을 비판적으로 읽고 창의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 정의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물론 몇몇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 비판적으로 읽고 쓰는 능력을 강조하는 학자분들 말이지요. 게다가 여기에 정보화 시대, 더 나아가서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맞이해서 디지털화된 정보를 읽고 쓸 줄 아는 디지털 문해력이나 음악 또는 음향 등을 파악할 줄 아는 문해력, 이미지를 활용하는 문해력 등의 여러 문해력이 덧붙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왜 문해력인가? 

제 기억으로는 문해력은 한 이십여년 전부터 계속 문제시 되어왔습니다. 사람들이 예전보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며 개탄하는 논설의 말미에는 항상 이 문해력 저하를 걱정하곤 했지요. 그런 논설들 대부분이 사람들이 아주 쉬운 한자어를 잘 몰라서 ‘지향’과 ‘지양'을 헷갈린다는 식으로 걱정을 늘어놓고는 했지요. 한자 공부 좀 하라는 말을 점잖게 돌려 말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문이나 방송에서 언급되는 ‘문해력 참사'의 예들을 보면 레파토리가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언론의 문제 의식은 여전히 수십 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좀 씁쓸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적 상황은 우리에게 고도의 ‘문해력'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엄청난 세상의 격변이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놀라운 속도로 변해갈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이 마치 100여 년 전의 ‘개화기'와 비슷한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100여 년 전, 우리 사회는 성리학 중심의 학문 체계에서 서양의 자연 과학을 기반으로 한 학문 체계로 털갈이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사서삼경'을 익히는 공부로는 세상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었지요. 대신 일본이나 중국을 매개로 전해 받은 서양의 학문, 즉 신학과 문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 신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돈도 벌었고요.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해력은 사회 전체를 부강하게 했고 개인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헤쳐 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능력이 되었구요. 인공지능, 블록체인, 암호화폐, 메타버스, 자율주행, 유전자 치료, 로봇 기술 등 우리의 삶을 엄청난 속도로 바꿔갈 기술들이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지식이 낡은 폐물이 되는 실정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단숨에 저 뒤로 떠밀려 갈 수도 있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이런 시대에 ‘문해력'은 ‘무기'입니다. 세상이 천천히 변화할 때에도 독서는 삶을 바꾸는 가장 질 좋고 값싼 수단이었지만, 지금처럼 세상이 급변할 때에는 정말 반드시 장착해야 할 필수 역량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은 ‘문해력'을 본능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 입니다. 

 

지금은 ‘문해력의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