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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국어

문해력의 최후 보루_수능 국어를 위한 변명(3)

by baewoonam 2024. 4. 24.

영역별 난도에 대한 수능의 기조가 바뀌었다!

 

수능 국어, 특히 독서 영역 킬러문항의 난도가 너무 높아서 2023년 한 해 동안 줄곧 문제가 됐습니다. 그 결과 평가원에서는 9월 모의고사부터 기조를 바꿨지요.(어떻게 기조가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기조가 바뀌기 전까지의 수능 국어는 다들 아시다시피 독서 영역의 난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학생들도 체감적으로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화작이나 언매를 가장 먼저, 빨리 풀고 나서 문학을 최단 시간 내에 풀어냅니다. 그래서 독서 영역에 쏟아 부을 시간을 확보했지요. 학생들 사이에서는 화작 10분 컷, 15분 컷, 이런 말들이 돌아다니고는 했습니다. 화작 영역을 10분 내에 끝내야 한다, 15분 내에 끝내야 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23년, 그러니까 24학년도 평가원 9모와 수능을 보면 그렇습니다. 이제는 수능 국어를 구성하는 세 영역, 즉 화작/언매와 문학, 독서 세 영역의 난도가 거의 엇비슷하게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영역을 꼽으라고 한다면 독서보다 오히려 문학이 꼽힐 것 같습니다. 이제 수험생들은 모든 영역을 골고루 준비해야 합니다. 그게 쉬울까요? 아니요. 더 어려워졌습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볼까요? 

평가원의 처방, ‘불국어'를 낳다!

 

교육 과정 평가원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변별의 기능을 해오던 독서 영역의 난도를 낮추면 당장 수능 국어가 입학 시험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뜩이나 영어 과목이 절대 평가여서 수학과 함께 변별 기능을 하는 주요 과목이 국어였는데, 갑자기 ‘물국어'가 되어 버리면 정말 찍어서 맞춘 한 문제에 몇 등급이 오가는 일도 벌어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평가원이 택한 방법은 세 파트(화작/언매, 문학, 독서)의 난도를 엇비슷하게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24학년도 수능에서 세 파트의 평균 오답률을 비교해보면 거의 비슷합니다. 평가원에서는 독서의 난도를 조금 깎은 대신, 문학과 화작/언매의 난도를 조금씩 올린 것이지요. 이런 경우, 전체 시험의 난도는 어떻게 될까요?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워집니다. 일단 학생들 입장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거죠. 독서만 어렵게 공부했는데, 빠르게 풀어내려 연습했던 파트가 어렵게 출제된다? 그러면 아마 정신적으로 힘들어질 것입니다. 게다가 중위권에서는 독서 지문 하나를 포기하고 나머지에 집중하는 형태로 점수를 확보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 전략이 먹힐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불국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동안 독서가 어려웠을까?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평가원에서는 왜 그동안 독서 영역이 어려운 수능 국어 시험을 만들었을까요? 독서 영역의 난도가 문제가 되니까 금방 나머지 영역의 난도를 올리고 독서 영역의 난도를 낮춰서, 수험생들이 손도 댈 수 없는(?) 킬러문항을 제거하면서도 1등급 기준은 역대 가장 낮은, 즉 변별력이 가장 높은 수능을 만들어 냈잖아요? 아니, 평가원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안하고 독서 영역의 난도가 높은, 그런 수능을 출제해 왔던 것일까요? 원래는 학생들의 수학능력을 테스트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게 입시의 변별 도구로 활용되면서 변질된 걸까요? 그래서 극악한 난도를 만들어 학생들을 괴롭히는 걸까요? 일부러 변별을 위해 교과 과정을 무시하고 대학 전공 수준의 어려운 지문을 들입다 부어놓은 것일까요? 제 생각에 평가원에서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이런 형태의 시험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가설'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평가원은 다른 선진국들의 교육 과정을 고려해서 수능 시험을 기획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평가원에서 발간한 여러 자료들(평가원의 사이트에서 PDF로 다운 받아 볼 수 있습니다.)을 보면 미국을 포함한 영국, 호주, 싱가포르 등 선진국들은 취미 수준의 문학 작품 읽기는 교과 과정에서 점차 배제하고 있습니다. 가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학을 폄하해서도 아니고요. 단지 주관적 감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글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글은 교양으로 취미삼아 읽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4차 산업 시대, 엄청나게 많은 정보와 지식이 생성되고 그것을 빠르게 습득해서 실생활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글을 읽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선진국들에서는 바로 이런 ‘어려운 글을 읽는 교육’을 매우 중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려운 글을 읽고 문항을 푼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수능 국어 시험의 독서 영역이 그런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꼭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어려운 지문으로 만들고 그것을 읽고 사실적, 비판적, 추론적 독해력을 발휘해 문항을 풀도록 하는 시험 영역이지요. 평가원은 아마도 OECD 국가들의 이러한 교육과정 변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그것을 교육과정에 반영했던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합니다. 사실 수능이 아니면 그런 ‘어려운 글을 읽는 능력'을 높일 기회가 별로 없잖아요. 가뜩이나 요즘 학생들의 문해력이 계속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나마 수능의 어려운 독서 파트가 학생들의 문해력 훈련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앞으로 수능 국어 시험은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  

 

학력고사 세대나 쉬운 수능 세대는 ‘어려운 글을 읽고 그것을 해독하여 문항을 푸는 시험'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성인이 되어서 일부 사람들을 빼고는 아예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좋은 대학을 나왔는데 그런 나도 읽지 못하는 지문을 고등학생에게 읽히냐고 탄식하는 것은 정말 탄식할 노릇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메타 인지가 제로에 가까운 사람들이지요. 일부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원래 신문 기사는 초등학교 5학년도 읽을 수 있도록 작성됩니다. 그런 글을 다루던 기자가 아무런 훈련도 하지 않고 갑자기 수능 국어 시험지를 펼쳐놓고 내가 못 푸는 것은 잘못된 시험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어불 성설이지요. 그건 ‘문해력 훈련이 부족해서' 못 읽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저는 평가원이 수능 국어 영역을 ‘대한민국 학생들의 문해력을 지키는 보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정말 80분 시험 시간 동안 1-2명의 학생만 풀 수 있는 ‘킬러 문항'은 부활하지 않겠지만 독서 파트가 지금보다는 조금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문학 파트나 화작/언매 파트는 지난 24학년도 9모나 수능에서는 변별을 위해 확연하게 어려워졌지만 계속 그렇게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 각도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문학 파트의 난도는 기본적으로 작품이 낯설거나 매우 사변적일 때 올라가게 되는데요, 그러자면 지금까지 출제했던 작품들 말고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조금 떨어지는 작품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금방 문제라는 것이 느껴지지요? 평가를 위해서 뛰어난 작품 대신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수준의 작품을 출제한다는 것이 이상하잖아요. 

 

이미 수능 전문가들은 수능 국어 시험에서 문학 영역의 문제가 대부분 ‘주관적 감상' 대신 ‘객관적 정보 처리'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문학 영역의 문항을 풀 때 독서 영역 문항을 푸는 것처럼 풀라고 합니다. 작품의 해석이 필요한 경우에는 <보기> 문항을 통해 어떤 맥락으로 해석했다는 것을 알려줄 정도입니다. 문학 작품을 대상으로 한 문항이지만, 결국 문해력을 테스트하는 문항이 되는 것입니다.